윤형씨는 대단한 오독을 거듭하여 범하고 있다. 그는, 내가 이미 '포식과 용해'라는 글을 통하여 지적하며 우려했던 대로 무한대로 논지를 확장시켜 나가며 그 넓이 만큼이나 많은 오류를 생산해낸 상태다. 대체 어디서 '이과와 문과'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지도 모르겠다. 문과든 이과든 간에 정확한 논리와 용어의 사용은 모든 지성인이 갖추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이다. 내가 문과인지, 이과인지, 넘겨 짚는 것은 그의 자유지만, 논의에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간의 논의를 통하여 내가 지적한 수많은, 윤형씨의 오류에 대하여 윤형씨의 언급들이 거의 없었다고 보지만, 윤형씨 본인이 할 이야기를 다 했다고 하니 더 이상 지적하는 것은 무용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하여 간단히 논점 몇가지를 짚어 보고자 한다.
일단, 그는 이택광 교수가 사용한 용어의 명확성이라든지, 맥락적 해석을 한 것이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했다. 또한, 그것은 이미 모두 나의 글 2편을 통하여 상세하게 지적한 바 있다. 간단하게 짚자면, 최초의 논쟁이 생겨난 나의 글이나 이택광 교수의 글에서 그런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아도 '우생학' 정도에 그친다. 그리고, 이 우생학과 진화심리학의 관계 혹은 구별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통속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다. 한윤형이 인용한 김동춘 교수의 글도 마찬가지다. 김동춘 교수의 책을 마침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과거 그의 책에서 한윤형이 인용한 것과 같은 귀절을 읽고, 유럽 파시즘의 성립과정, 혹은 시민 계급의 성립과정에서 작동했던 사회적 요건들을 한국 역사에 무리하게 대입시켜 '인종주의, 혈통주의'를 도출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한다고 생각했고,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쨌든 그가 서술한 '풍경'들은 부정적인 것들이었고 '인종주의'는 그 부정적인 서술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사'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그 흔한 욕설들 앞에 '개'자가 하나 더 붙는다고 하여 엄밀한 사회과학적 논문도 아닌 것에 대하여 핏대 올리며 비판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김동춘 교수가 내가 예상하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런 서술을 가미하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할 말은 없다. 순전히 나의 예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에 대한 한윤형의 서술은 우생학과 진화심리학의 공유 지반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나는 공유지반이라는 점에 대하여 그가 최초에 글에서 든 이 근거가 왜 그가 쓴 나중의 글에서는 '자연주의 평론'을 공유지반으로 지목하며 갑자기 바뀌는 지 잘 이해하지를 못하겠다.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한윤형씨가 생각하듯이 진화심리학적 사회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는 것도 대체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의 지점에서 이기적이거나 이타적 인간성에 대한 설명, 사회주의가 인간 본성에 맞는가, 따위에 부분이 머물러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또다른 인문학, 사회과학 등등에서 인간에 대한 기본 가정의 수립을 위하여 필수적인 '전제'로 작동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에 주목을 받는 것이다. 내가 아는 진화심리학적(생물학적) 비평이라고 볼(오해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며 이것들은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지나치게 전문적인 영역이라 윤형씨에게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택광씨가 이런 사례들을 지적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내가 비판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택광씨는 진보 담론의 영역에서 진화생물학이 차지하는 중량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라 여기거나 혹은 우생학과의 착각을 범하고 있다고 예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사회과학적 평론'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착취'를 도덕적으로 악한 것, 이라고 규정하는 마르크스의 진술을 제하고는 온통 '과학'의 영역 하에서 '자본주의를 해부'한 것 뿐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진화생물학, 심리학도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현실에 대입시키는 가, 는 개인의 자유이며, 그것은 다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영역, 좀 더 특정하자면, 정치의 영역으로 귀속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주의 평론'은 내가 이전에도 거듭 언급했듯 무가치한 것이라 본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윤형씨가 거론한 예의 최재천의 헌재 진술은 완전한 헛소리였다. 윤형씨도 언급했듯이 미토콘드리아 유전자가 모계유전된다는 '사실'과 호주제 폐지의 '당위'는 그 연관성이 전혀 없다. 이것은 마치 자연은 약육강식의 세계가 지배하기 때문에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제국주의나 철저한 약육강식의 정글 자본주의가 당위성을 가진다, 라는 서술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대체로 한윤형씨와 합의를 이루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차후의 것이다. 이런 진술들이 '진화심리학적 평론'인가, 또한 이런 진술들이 '독특한 권위'를 가지는가, 에 대한 것 말이다. 오류로 점철된 논리는 그 권위를 잃어야 마땅한 것이다. 만약, 그 오류의 논리가 권위를 획득한다면, 그 권위에 대한 잘못된 추앙이라 볼 수 있다. 잘못된 추앙이 많다고 하여 그 권위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윤형씨는 전혀 이성과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도 하는데 이것은 최재천의 헌재 진술보다도 더한 이야기이다. '진화심리학이 인간의 욕망을 설명한다면, 과연, 자연주의 평론에 대한 욕망을 억제할 수 있을까의 모순이 있다.'라는 그의 이야기 말이다. 나는 도대체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야 할지 잘 모를 정도의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만약, 이 진술을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독자가 한명이라도 있다면, 나의 글이나 윤형씨의 글에 댓글로 알려주길 바란다. 그러면, 다시 진득하게 하루나 이틀 정도를 투자하여 이것에 대하여 생각해보겠다. 나로서는, 그렇기 때문에 이를 통해 전개하는 그의 논의를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나는 진화생물학이 이택광이 인용하는 맥락과는 전혀 다른 존재의 학문이라고 지적한 바는 있으나 우수하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그것이 '우리'라는 수식을 달만한 영역이라고 인정한 사실도 없다. 나는 그런 분야와는 거의 무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그를 비판하기 위하여 '생물학적 개념'을 끌어온 사실도 없다. 윤형씨가 오독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포식과 용해'라는 글에서 그의 글 스타일이 왜 불편한 것인지 밝히기 위하여 생물학적 '비유'를 통하여 내가 생각하는 바를 선언한 적이 있다는 것 정도겠다. 나는 그 글을 통하여 그를 비판한 내용이 전혀 없다.
나는 대체 어디서 진화생물학과 우생학의 공통적인 지반이 설명되었는지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다. 윤형씨나 이택광 교수가 그것에 대하여 이성적인 설명을 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윤형씨 자신이 지반이라 느끼고 있는 그 어떤 존재, '자연주의 평론'을 예로 든 적은 있어도 말이다. 만약, 5년 전의 단 한 차례 최재천의 헛소리를 그 '지반'이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한윤형씨가 이택광교수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한차례의 이야기가 '진보담론'을 경제학과 함께 잠식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지독한 과장이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어찌되었든, 한윤형씨든 이택광 교수든,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또 한가지, 한윤형씨나 이택광씨가 생각하듯이, 진화심리학이나 진화생물학은 좌파적이지도 않으며 우파적이지도 않다. 물론, 그 내용이 현실적으로 보아 우파의 성향에 부합하는 설명을 많이 가지고 있으나, 종교에 반한다는 것으로 인하여 우파에서는 배척당하는 경향이 크며 좌파에서는 '이기성'에 대한 인정때문에 감정적으로 비토되는 상황이다.
ps. 에리히 프롬과 같은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잘 모르겠다. 에리히 프롬이 자기 멋대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의 자유고 내가 간섭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만약, 이것이 진화생물학에 대한 이택광 교수의 규정에 대한 비유였다면, 그것은 매우 부적절한 비유였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네크로필리아가 시체애호증이든 뭐든 간에, 그 용례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는 그 용어를 사용하는 언중의 합의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네크로필라아의 용레에 동의하지 않는 언중이 절대 다수라면, 에리히 프롬의 그 용법은 폐기되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페기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에리히 프롬이 매번 그 용어를 사용하며 그런 전제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또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necrophilia라는 용어의 조어 과정에 에리히 프롬의 해석이 개입될 만한 여지가 있었다면, 또한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진화생물학이나 우생학과 같은 용어에 대하여 이택광 교수나 한윤형이 그런 시도를 한 적은 있는가, 만약 없다면, 그 용례에 대하여 언중이 합의하고 있는 바는 있는가. 그들이 생각해볼 문제다.
일단, 그는 이택광 교수가 사용한 용어의 명확성이라든지, 맥락적 해석을 한 것이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했다. 또한, 그것은 이미 모두 나의 글 2편을 통하여 상세하게 지적한 바 있다. 간단하게 짚자면, 최초의 논쟁이 생겨난 나의 글이나 이택광 교수의 글에서 그런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아도 '우생학' 정도에 그친다. 그리고, 이 우생학과 진화심리학의 관계 혹은 구별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통속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다. 한윤형이 인용한 김동춘 교수의 글도 마찬가지다. 김동춘 교수의 책을 마침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과거 그의 책에서 한윤형이 인용한 것과 같은 귀절을 읽고, 유럽 파시즘의 성립과정, 혹은 시민 계급의 성립과정에서 작동했던 사회적 요건들을 한국 역사에 무리하게 대입시켜 '인종주의, 혈통주의'를 도출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한다고 생각했고,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쨌든 그가 서술한 '풍경'들은 부정적인 것들이었고 '인종주의'는 그 부정적인 서술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사'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그 흔한 욕설들 앞에 '개'자가 하나 더 붙는다고 하여 엄밀한 사회과학적 논문도 아닌 것에 대하여 핏대 올리며 비판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김동춘 교수가 내가 예상하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런 서술을 가미하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할 말은 없다. 순전히 나의 예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에 대한 한윤형의 서술은 우생학과 진화심리학의 공유 지반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나는 공유지반이라는 점에 대하여 그가 최초에 글에서 든 이 근거가 왜 그가 쓴 나중의 글에서는 '자연주의 평론'을 공유지반으로 지목하며 갑자기 바뀌는 지 잘 이해하지를 못하겠다.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한윤형씨가 생각하듯이 진화심리학적 사회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는 것도 대체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의 지점에서 이기적이거나 이타적 인간성에 대한 설명, 사회주의가 인간 본성에 맞는가, 따위에 부분이 머물러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또다른 인문학, 사회과학 등등에서 인간에 대한 기본 가정의 수립을 위하여 필수적인 '전제'로 작동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에 주목을 받는 것이다. 내가 아는 진화심리학적(생물학적) 비평이라고 볼(오해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며 이것들은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지나치게 전문적인 영역이라 윤형씨에게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택광씨가 이런 사례들을 지적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내가 비판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택광씨는 진보 담론의 영역에서 진화생물학이 차지하는 중량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라 여기거나 혹은 우생학과의 착각을 범하고 있다고 예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사회과학적 평론'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착취'를 도덕적으로 악한 것, 이라고 규정하는 마르크스의 진술을 제하고는 온통 '과학'의 영역 하에서 '자본주의를 해부'한 것 뿐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진화생물학, 심리학도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현실에 대입시키는 가, 는 개인의 자유이며, 그것은 다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영역, 좀 더 특정하자면, 정치의 영역으로 귀속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주의 평론'은 내가 이전에도 거듭 언급했듯 무가치한 것이라 본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윤형씨가 거론한 예의 최재천의 헌재 진술은 완전한 헛소리였다. 윤형씨도 언급했듯이 미토콘드리아 유전자가 모계유전된다는 '사실'과 호주제 폐지의 '당위'는 그 연관성이 전혀 없다. 이것은 마치 자연은 약육강식의 세계가 지배하기 때문에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제국주의나 철저한 약육강식의 정글 자본주의가 당위성을 가진다, 라는 서술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대체로 한윤형씨와 합의를 이루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차후의 것이다. 이런 진술들이 '진화심리학적 평론'인가, 또한 이런 진술들이 '독특한 권위'를 가지는가, 에 대한 것 말이다. 오류로 점철된 논리는 그 권위를 잃어야 마땅한 것이다. 만약, 그 오류의 논리가 권위를 획득한다면, 그 권위에 대한 잘못된 추앙이라 볼 수 있다. 잘못된 추앙이 많다고 하여 그 권위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윤형씨는 전혀 이성과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도 하는데 이것은 최재천의 헌재 진술보다도 더한 이야기이다. '진화심리학이 인간의 욕망을 설명한다면, 과연, 자연주의 평론에 대한 욕망을 억제할 수 있을까의 모순이 있다.'라는 그의 이야기 말이다. 나는 도대체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야 할지 잘 모를 정도의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만약, 이 진술을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독자가 한명이라도 있다면, 나의 글이나 윤형씨의 글에 댓글로 알려주길 바란다. 그러면, 다시 진득하게 하루나 이틀 정도를 투자하여 이것에 대하여 생각해보겠다. 나로서는, 그렇기 때문에 이를 통해 전개하는 그의 논의를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나는 진화생물학이 이택광이 인용하는 맥락과는 전혀 다른 존재의 학문이라고 지적한 바는 있으나 우수하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그것이 '우리'라는 수식을 달만한 영역이라고 인정한 사실도 없다. 나는 그런 분야와는 거의 무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그를 비판하기 위하여 '생물학적 개념'을 끌어온 사실도 없다. 윤형씨가 오독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포식과 용해'라는 글에서 그의 글 스타일이 왜 불편한 것인지 밝히기 위하여 생물학적 '비유'를 통하여 내가 생각하는 바를 선언한 적이 있다는 것 정도겠다. 나는 그 글을 통하여 그를 비판한 내용이 전혀 없다.
나는 대체 어디서 진화생물학과 우생학의 공통적인 지반이 설명되었는지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다. 윤형씨나 이택광 교수가 그것에 대하여 이성적인 설명을 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윤형씨 자신이 지반이라 느끼고 있는 그 어떤 존재, '자연주의 평론'을 예로 든 적은 있어도 말이다. 만약, 5년 전의 단 한 차례 최재천의 헛소리를 그 '지반'이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한윤형씨가 이택광교수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한차례의 이야기가 '진보담론'을 경제학과 함께 잠식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지독한 과장이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어찌되었든, 한윤형씨든 이택광 교수든,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또 한가지, 한윤형씨나 이택광씨가 생각하듯이, 진화심리학이나 진화생물학은 좌파적이지도 않으며 우파적이지도 않다. 물론, 그 내용이 현실적으로 보아 우파의 성향에 부합하는 설명을 많이 가지고 있으나, 종교에 반한다는 것으로 인하여 우파에서는 배척당하는 경향이 크며 좌파에서는 '이기성'에 대한 인정때문에 감정적으로 비토되는 상황이다.
ps. 에리히 프롬과 같은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잘 모르겠다. 에리히 프롬이 자기 멋대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의 자유고 내가 간섭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만약, 이것이 진화생물학에 대한 이택광 교수의 규정에 대한 비유였다면, 그것은 매우 부적절한 비유였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네크로필리아가 시체애호증이든 뭐든 간에, 그 용례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는 그 용어를 사용하는 언중의 합의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네크로필라아의 용레에 동의하지 않는 언중이 절대 다수라면, 에리히 프롬의 그 용법은 폐기되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페기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에리히 프롬이 매번 그 용어를 사용하며 그런 전제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또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necrophilia라는 용어의 조어 과정에 에리히 프롬의 해석이 개입될 만한 여지가 있었다면, 또한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진화생물학이나 우생학과 같은 용어에 대하여 이택광 교수나 한윤형이 그런 시도를 한 적은 있는가, 만약 없다면, 그 용례에 대하여 언중이 합의하고 있는 바는 있는가. 그들이 생각해볼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