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이택광의 우생학’과 ‘한윤형의 우생학’
한윤형은 박정희의 우생학을 논하며 ‘국민을 개조하여 이미 진화한 서구 국가들을 따라잡자는 것이 박정희 체제의 욕망이었다면, 그것을 우생학이라 부르는 것엔 큰 무리가 없다’고 하며 박정희가 우생학적 정책을 펼쳤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면, 고작, 박정희 같은 단순한 사례 뿐 만이 아니라 선진국을 따라잡고자 하는 거의 모든 국가는 우생학적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 된다. 사실, 핵심적인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서구 국가를 따라잡는다’는 욕망을 우생학이라 규정하기 시작한다면,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이택광 교수의 글에서의 ‘우생학의 패러다임 내부에서의 진화심리학’이라는 논리적 맥락과 어긋나 버린다. 즉, 한윤형은 용어 사용에서의 자연 과학도 들의 ‘빡빡함’을 지적하는 논리로 용어 사용의 개인적 독점권을 주장하며(그것이 우생학, 진화생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정의라도!) 개가를 올렸지만, 한윤형 자신의 ‘유도리’ 있는 각각의 맥락적 용어 사용은 우생학을 서술자의 사용에 따라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한윤형의 우생학’은 서구 국가들을 따라잡자는 욕망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반해 ‘이택광의 우생학’은 (진화생물학을 유물론적인 속성을 가진다고 한 것으로, 진화생물학은 우생학의 패러다임 내부에 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욕망의 반영이라기 보다는 아마도, 우생학 그 자체나 또다른 우생학을 의미하는 것이 되며, ‘한윤형의 우생학’과는 차이를 보인다. 왜냐하면, 이택광은 ‘경제개발’과 ‘우생학’을 등치시키며 박정희를 지탱하던 담론을 이 2가지로 칭하고 있는데, 경제개발담론 역시 가장 핵심적으로 서구를 따라잡자고 하는 욕망(한윤형의 말대로)의 발현이었기 때문이다. 한윤형 식의 독해라면, 박정희를 지탱하는 담론에서 경제개발 담론도 우생학적 담론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거나 경제개발담론이 우생학적 담론의 하위에 속하는 담론이 되어야 한다. ‘우생학적 담론’ 중 ‘경제 분과’를 차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가능성 모두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윤형의 우생학’은 ‘이택광의 우생학’ 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로서 그가 이택광을 옹호한 논리는 흐트러진다. 이택광과 한윤형은 서로 다른 주제를 논하고 있었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한윤형과 이택광의 연결고리는 끊어지기 때문에, 한윤형의 옹호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는 사실.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잔존한다. 도대체 ‘이택광의 우생학’의 정체는 뭔데?
결론
어쨌든, 박정희의 정책은 기존의 정착된 ‘우생학’이라는 학문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이택광의 우생학’이든, ‘한윤형의 우생학’이든, 그들이 우생학을 무엇으로 정의하든지 그것은 그들의 자유겠다. 하지만, 이것을 ‘진화심리학’이라는 또다른 분과학문과 연계시키고 심지어는 우생학의 패러다임을 운운하며 진화심리학을 그 하부에 두려는 작업은 ‘기존의 우생학’을 차용하여 결부시키지 않고서 불가능하다. 풀어 말하자면, 우생학을 지 맘대로 정의하고 서술하는 것은 자유인데, 그러다 보면 진화심리학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한윤형의 우생학’인 ‘서구를 따라 잡고자 하는 욕망’이 진화심리학과 무관하다는 것이 모범적인 사례다.
한윤형은 ‘이택광의 우생학’에 대하여 도맡아 주석을 달며 옹호했지만, 그 과정은 또다른 ‘한윤형의 우생학’을 성립시켰을 뿐이다. 이택광 뿐만 아니라 (이미 이택광과 괴리된)자신의 논리 모두를 커버하려다 보니 우생학이 ‘서구를 따라 잡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형태의 거대한 괴물이 되어 버린 셈이다. 사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하나다. 이택광의 애초 우생학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틀렸다는 것. 이 상황에서는 어떤 형태를 띈 옹호든 균열을 일으킬 뿐이다. 교모하게, 근시안적으로 그 균열을 감추는 작업을 취하여도 이택광의 글의 맥락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언제든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사실, 촌놈처럼 우생학에 대한 맥락적 사용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며, ‘기존의 우생학’, ‘한윤형의 우생학’, ‘이택광의 우생학’이라고 구분지을 필요도 없다. 우생학은 그냥 하나다. 우생학은 우생학인 것이다. 만약, 이것을 인문학적 특수성이라 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그럴수록 인문학이라는 학문의 설득력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기 바란다. 그러니까, 내가 주구장창 말하는 것이다. 서술자 마다 다른 맥락적 사용이라는 허깨비를 주장하려 한다면, 그냥 시를 쓰라는 것. 한윤형이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시적 비유'니까.
한윤형은 박정희의 우생학을 논하며 ‘국민을 개조하여 이미 진화한 서구 국가들을 따라잡자는 것이 박정희 체제의 욕망이었다면, 그것을 우생학이라 부르는 것엔 큰 무리가 없다’고 하며 박정희가 우생학적 정책을 펼쳤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면, 고작, 박정희 같은 단순한 사례 뿐 만이 아니라 선진국을 따라잡고자 하는 거의 모든 국가는 우생학적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 된다. 사실, 핵심적인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서구 국가를 따라잡는다’는 욕망을 우생학이라 규정하기 시작한다면,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이택광 교수의 글에서의 ‘우생학의 패러다임 내부에서의 진화심리학’이라는 논리적 맥락과 어긋나 버린다. 즉, 한윤형은 용어 사용에서의 자연 과학도 들의 ‘빡빡함’을 지적하는 논리로 용어 사용의 개인적 독점권을 주장하며(그것이 우생학, 진화생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정의라도!) 개가를 올렸지만, 한윤형 자신의 ‘유도리’ 있는 각각의 맥락적 용어 사용은 우생학을 서술자의 사용에 따라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한윤형의 우생학’은 서구 국가들을 따라잡자는 욕망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반해 ‘이택광의 우생학’은 (진화생물학을 유물론적인 속성을 가진다고 한 것으로, 진화생물학은 우생학의 패러다임 내부에 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욕망의 반영이라기 보다는 아마도, 우생학 그 자체나 또다른 우생학을 의미하는 것이 되며, ‘한윤형의 우생학’과는 차이를 보인다. 왜냐하면, 이택광은 ‘경제개발’과 ‘우생학’을 등치시키며 박정희를 지탱하던 담론을 이 2가지로 칭하고 있는데, 경제개발담론 역시 가장 핵심적으로 서구를 따라잡자고 하는 욕망(한윤형의 말대로)의 발현이었기 때문이다. 한윤형 식의 독해라면, 박정희를 지탱하는 담론에서 경제개발 담론도 우생학적 담론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거나 경제개발담론이 우생학적 담론의 하위에 속하는 담론이 되어야 한다. ‘우생학적 담론’ 중 ‘경제 분과’를 차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가능성 모두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윤형의 우생학’은 ‘이택광의 우생학’ 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로서 그가 이택광을 옹호한 논리는 흐트러진다. 이택광과 한윤형은 서로 다른 주제를 논하고 있었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한윤형과 이택광의 연결고리는 끊어지기 때문에, 한윤형의 옹호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는 사실.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잔존한다. 도대체 ‘이택광의 우생학’의 정체는 뭔데?
결론
어쨌든, 박정희의 정책은 기존의 정착된 ‘우생학’이라는 학문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이택광의 우생학’이든, ‘한윤형의 우생학’이든, 그들이 우생학을 무엇으로 정의하든지 그것은 그들의 자유겠다. 하지만, 이것을 ‘진화심리학’이라는 또다른 분과학문과 연계시키고 심지어는 우생학의 패러다임을 운운하며 진화심리학을 그 하부에 두려는 작업은 ‘기존의 우생학’을 차용하여 결부시키지 않고서 불가능하다. 풀어 말하자면, 우생학을 지 맘대로 정의하고 서술하는 것은 자유인데, 그러다 보면 진화심리학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한윤형의 우생학’인 ‘서구를 따라 잡고자 하는 욕망’이 진화심리학과 무관하다는 것이 모범적인 사례다.
한윤형은 ‘이택광의 우생학’에 대하여 도맡아 주석을 달며 옹호했지만, 그 과정은 또다른 ‘한윤형의 우생학’을 성립시켰을 뿐이다. 이택광 뿐만 아니라 (이미 이택광과 괴리된)자신의 논리 모두를 커버하려다 보니 우생학이 ‘서구를 따라 잡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형태의 거대한 괴물이 되어 버린 셈이다. 사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하나다. 이택광의 애초 우생학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틀렸다는 것. 이 상황에서는 어떤 형태를 띈 옹호든 균열을 일으킬 뿐이다. 교모하게, 근시안적으로 그 균열을 감추는 작업을 취하여도 이택광의 글의 맥락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언제든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사실, 촌놈처럼 우생학에 대한 맥락적 사용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며, ‘기존의 우생학’, ‘한윤형의 우생학’, ‘이택광의 우생학’이라고 구분지을 필요도 없다. 우생학은 그냥 하나다. 우생학은 우생학인 것이다. 만약, 이것을 인문학적 특수성이라 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그럴수록 인문학이라는 학문의 설득력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기 바란다. 그러니까, 내가 주구장창 말하는 것이다. 서술자 마다 다른 맥락적 사용이라는 허깨비를 주장하려 한다면, 그냥 시를 쓰라는 것. 한윤형이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시적 비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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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한 정리 by 김에녹시아
- (1) 우생학과 진화심리학 by 김에녹시아
- 비판2 by anoxia
- [펌] 혈액형의 성격과 독일은 혈액형 우생학으로 유태인 죽였다 by kiminternet
- 윤형씨에게 단 댓글 by 김에녹시아




